김대중 육성회고록-김대중기록

김대중 육성회고록은 김대중 전문 연구자들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된 유일한 자전적 성찰이자 기록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구진들과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회 42시간 26분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결실이 바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다.
이 책에는 김대중 대통령만이 증언할 수 있는 경이로운 인간 실록이자 한 탁월한 정치지도자가 겪은 역사 풍경이 담겨 있다.
소년기와 청년기, 해방 전후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통찰하는 그의 생각과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다룬다.
자유당과 이승만의 독재 시절, 4·19 혁명을 겪으면서 정치에 나서고, 박정희 쿠데타와 유신 선포 속에서 죽음을 딛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한다.
다시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수난받는 민중의 역사 속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는 큰 정치인 김대중의 행로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러나 투옥과 망명을 통해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 사상은 찬란하게 성장한다.
감옥에서의 높은 수준의 독서, 망명과 유학을 통한 세계적 지성과의 교류와 토론은 그를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로 일으켜 세운다.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에 걸친 투옥, 3년여의 망명생활과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을 통해 세계평화와 인권에 대한 확고한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한다.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체득하게 된다.[한길사]

김대중(金大中)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태어났다. 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평생 5번의 죽을 고비, 6년여의 감옥생활, 3년여의 망명 생활, 지속적인 가택연금 등의 고난을 겪었다. 1971년 7대, 1987년 13대, 1992년 14대 대선에서 연이어 낙선했으나, 1997년 15대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선거에 의한 평화적인 정권교체였다. 대통령 김대중은 1997년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2000년 6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냈다. 제주4·3특별법 제정,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등 각종 개혁조치로 민주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IT와 벤처기업 육성, 문화 강국 건설, 한국복지국가의 기틀도 마련했다. 김대중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민주인권 지도자로서 한국 외교의 전성기를 이뤄내고,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3년 2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3년 11월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여 설립된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도서관이다. 김대중도서관은 김 대통령 개인에 대한 자료와 그와 관련한 민주화운동, 정당사, 재임기 활동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전문적인 사료연구 기관으로,. 한국의 대통령기념사업 및 대통령학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후세대들이 찾는 살아 숨 쉬는 기록물 |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펴내면서

1. 나의 고향 하의도와 목포
2. 혼돈과 역경의 시간들
3. 시련 속에서 꽃피운 의정활동
4. 민주세력의 리더로 떠오르다
5. 유신독재에 맞서다
6. 서울의 봄부터 13대 대선
7. 13대 국회부터 15대 대통령 당선
8. 한국경제의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
9. 민주인권대통령
10.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시작
11.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외교
12. 후배 정치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

감사의 말씀 | 김홍업ㆍ김성재

한국 정치의 나침반이자 항해도 | 류상영ㆍ장신기ㆍ박명림
김대중 대통령 연보
김대중 대통령 육성 연설 QR코드 목록

김대중 육성회고록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삶과 성장 과정을 회고한 자서전이다. 이 책은 김대중이 정치인으로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가 어떻게 현대 한국 정치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 회고록은 김대중의 정치적 입장과 철학, 그리고 그가 마주한 위기와 도전을 중심으로 전개 된다.

초기 생애와 성장 배경

김대중은 1925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책은 그가 자라온 환경, 어린 시절의 가난과 어려운 생활,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시작 된다. 김대중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에 대한 갈망이 강했고, 일본의 점령 하에서도 학문을 열심히 하며 성장했다. 대학 시절 그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초기 경험들이 그가 후에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 활동의 시작

김대중은 1950년대에 정치에 입문하며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이승만 정부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점차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또한 김대중은 경제 발전을 중시하는 개혁적 성향을 보였으며, 그가 정치에 입문한 배경에는 민족적 독립과 민주주의 확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김대중은 주로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대중과 소통하기도 했다.

정치적 위기와 도전

김대중은 정치 경력 중 여러 차례 위기와 도전을 겪었다. 특히 박정희 군사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여러 차례 체포와 투옥을 경험했다. 그는 고문과 같은 극심한 인권 침해를 받으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군사 정권 하에서 그는 여러 차례 해외로 추방되거나 이념적 타격을 입기도 했다.

국내외 정치적 성과

김대중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드디어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의 대통령 취임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며,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게 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김대중은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많은 힘을 쏟았으며, 이를 위해 ‘햇볕 정책’을 발표하여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추구했다. 이 정책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되었고, 김대중은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후반기 정치와 사후 평가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다양한 국제 기구에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국제적 목소리를 높였고, 후임 대통령에게도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은 그가 한국 사회에 남긴 민주주의의 가치와 남북 관계에서의 평화적인 접근법, 경제 발전을 위한 노력 등으로 평가된다.

그의 사후, 김대중의 유산은 여전히 많은 논란과 평가의 대상이 되지만, 그가 이룩한 정치적 성과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와 세계 정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까지,하의도와 목포에서 얻은 정신적 자산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당시 하의도는 농지 대부분이 기존 지주들의 탐욕에 의해서 결국 일본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였고 농민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곳이었다.

저항 정신이 있는 지역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아버지는 마을의 구장이었다.

덕분에 『매일신보』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면을 열심히 읽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의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김대중 대통령은 공부를 위해 목포로 이사했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7대 도시에 들어갈 정도로 큰 규모의 항구도시였다.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김대중 대통령은 웅변에 소질을 보였다.

2학년 담임 무쿠모토 선생님은 “김대중의 웅변은 일본 대의사가 의사당에서 한 것에 못지않다”며 칭찬했다. 졸업 이후 목포 전남기선에서 일하다 해운 사업을 했다.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상업도시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해운회사와 『목포일보』를 경영하면서 경제의 흐름을 배우고, 회계를 비롯한 각종 경제 지식까지 깨우쳤다.

이때의 경험은 국회의원이 된 후 정책 수립과 예산 심의를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 직후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거리에 붙이고 다녔던 것, 목포공립상업학교에서 철수 전의 일본군과 학생들이 충돌했을 때 소방차를 타고 가서 중재했던 것, 1946년 대구 10·1 사건 때 목포 지역 정치적 라이벌의 무고로 구금당했던 것 등 다양한 젊은 시절 일화가 등장한다.

사업 대금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강을 건넌 후 여러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걸어서 목포까지 내려갔다.

생환 이후 사업을 계속하던 김대중 대통령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보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정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무소속으로 3대 총선에 출마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투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후 민주당에 입당해 소장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중략]

인권과 평등,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

김대중 대통령은 중요한 순간마다 어떤 신념으로 행동했는지를 회고한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면모는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자다. 자유, 평화통일,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투신하고 가혹한 탄압을 받아왔던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입당 후 출마한 1958년 총선에서 불법적으로 후보등록을 취소당했고, 1961년 국회의원 첫 당선 3일 후 5·16 쿠데타가 발생해 선서도 하기 전에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면서 지도자로 성장한 그는 1969년에는 3선개헌을 막기 위해 시민사회 세력과 함께 반대투쟁에 나선다. 당시 효창운동장에서 했던 연설은 “15분 연설 도중 박수가 20번 가까이 나올 정도로 아주 큰 호응”을 얻었다.[중략]

대한민국 최고의 국제공공재 ‘김대중’의 평화외교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투옥되고 납치되고 망명투쟁을 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의 행보는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대통령 당선 후 국가부도 직전의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켜 빠른 속도로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지식정보·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보며 세계는 경이로운 눈빛을 보냈다. 북한·일본과도 화해하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우리나라의 국격이 상승해 외교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외교는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 1971년 7대 대선 때부터 공약으로 내세웠던 ‘4대국 안전보장론’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감안하면 남북한 사이의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도 주변 4대국(미·일·중·소)과의 외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최소한 평화통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협조적인 정책을 취하도록 하는 ‘협력적 자주’의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클린턴과 부시 대통령,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 중국의 장쩌민 주석,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경제위기 극복에 대한 협조’와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중략]

미래를 준비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공부와 연마를 통해 준비된 대통령으로 시대의 부름을 받았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보면, 그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최고의 쓰임을 받았던 이유가 일찍부터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국제관계, 경제, 첨단기술, 문화 등 미래사회를 전망하고 대비하는 통찰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특정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전문가와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의 지식을 갖추”는 것이 정치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강조한다.
첫째,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화를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파악하고 외국자본 문제에 대비했다.

“부존자원이 적고 국내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외국인 투자 자유화 조치를 취해 외화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선진 경영 능력을 배우고 금융기관들도 선진 금융 기법을 배우도록 했다.

이런 노력이 IMF 차입금을 당초 계획보다 3년 빨리 상환하고 경제가 새롭게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김대중 대통령은 평가한다.[중략]

연대와 통합을 실천한 첫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연대와 통합이었다. 김대중의 정치는 이념, 진영, 지역을 넘어서는 연합정치였다.

해방 직후 정치를 시작하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은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했다. 영구분단으로 가지 않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두고 방법을 모색했다.

3당합당으로 보수대연합이 만들어졌을 때 김대중 대통령의 신민당은 이기택·노무현 등의 민주당과 민주대연합을 이뤘다.

이때 신민당의 당세가 강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통합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공동대표제를 채택하고 주요 당직에 민주당계 인사들을 기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1997년 대선 때 DJP연합을 통해 보수 진영과의 연대를 이뤄,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 시대적 과제 해결을 위한 가치연대이자 정치연대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역주의, 지역감정 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1971년 대선 이래 지역주의의 큰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수십 년 동안 차별받은 호남 지역이 다른 지역과 동등하게 대우받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어느 지역에도 특별한 특혜를 주지 않도록 해서 지역 간 반목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으려고 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전 생애를 따라가보면 그는 “이상적 현실주의자”였다. 신념을 가지고 정치하면서도 국민들의 필요를 등한시하지 않는 책임 있는 정치인이었다.

정치가 국민의 생활과 괴리되고 정치의 생산성이 낮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김대중 대통령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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